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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사례와 非 모범 사례를 남긴 '감독-배우' 부부

14.07.04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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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용 감독과 중국배우 탕웨이의 결혼 소식으로 감독과 배우들 간의 러브 스토리가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다.
 
작품에 대해 서로 진지하게 논의하다 서로에 대해 교감하며 자연히 연애의 감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감독과 배우의 연애는 그 점에서 배우들 간의 열애와는 조금 다른 성숙한 사랑으로 비칠때가 있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도 아름다운 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 많은 스타 커플 처럼 사고를 치거나 씁쓸한 뒷소문만 남긴 채 가십으로 기억 될때가 있었다. 수많은 사연을 남겼던 감독,배우들의 러브 스토리중 대표적인 각각의 두 사례를 모범 사례와 비모범 사례로 나누어 보도록 하겠다.
 
 
모범 사례
 
'한 평생을 함께 한 부부' 페데리코 펠리니 & 줄리에타 마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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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가을 이탈리아 라디오 방송국의 극작가로 일하고 있었던 평범한 청년 페데리코 펠리니는 아름다운 여성 성우 줄리에타 마시나를 만난다. 풍자만화와 시나리오 작가를 병행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펠리니였지만, 자신의 마음을 흔든 그녀만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고백하고 교제를 시작한 후 1943년 두 커플은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이 당시 펠리니는 23살, 줄리에타는 22살이었다.
 
결혼 후 줄리에타가 첫째 아이를 임신하며 행복한 가정의 시작을 알리는 듯 했다. 하지만 첫째 아이는 유산하였고, 이듬해 태어난 아이마저 폐렴을 잃어 잃게 된다. 이같은 슬픔이 가시기도 전해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펠리니와 줄리에타는 직업을 읽게 되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펠리니는 네오 리얼리즘의 거장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의 각본과 조감독을 맡게 된다. 그 인연으로 로셀리니의 차기작 [전화의 저편]의 조감독과 각본을 맡게 되었고, 그 장면에서 자신의 아내 줄리에타 마시나를 출연시킨다. 이 영화로 첫 연기 데뷔를 한 그녀는 페데리코 펠리니가 연출을 맡은 [길]에 '젤소미나'로 출연하게 된다. 영화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가녀리고 순수한 여성을 연기한 줄리에타 마시나는 전세계 영화팬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세계적인 연기파 배우로 등극하기에 이른다.
 
이후 페데리코 펠리니와 줄리에타 마시나 부부는 여러 걸작을 만들며 명성을 높였지만, 얼마후 펠리니는 더 이상 줄리에타와 함께 작업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최고의 역작을 함께 만들어 냈지만, 펠리니에게는 줄리에타에 대한 의존도가 문제가 되었고, 젤소미나는 '펠리니의 뮤즈'라는 꼬리표를 그만때고 각자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개별 활동에서 펠리니는 승승장구와 흥행 실패를 반복하다 수많은 스캔들과 루머에 휩싸이는 등 방황을 하게 된다. 그리고 줄리에타는 다른 감독들의 작품에서 [길]의 '젤소미나'의 역할만 반복하다 그저 그런 배우로 전락하게 되었다.
 
펠리니와 줄리에타는 결국 서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신작에서 만나게 되었고, 이후 두 사람은 수많은 역작을 만들어 내며 평생을 함께했다. 펠리니는 1993년 10월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줄리에타 마시니는 1994년 3월 암으로 운명하며 펠리니를 따라가게 된다. 영화 같은 우여곡절의 삶을 지낸 부부는 마지막까지 영화처럼 사랑하고 함께했다.
 

'나이차를 극복한 커플' 샘 테일러 우드 & 애런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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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테일러 우드는 영화 감독이 되기 전, 위대한 사진 아티스트이자 예술가였고 가십/이슈 메이커로 유명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펫 샵 보이즈, 엘튼 존, 데이비드 베컴 등 유명인사들이 그녀의 작업 파트너였을 정도로 그녀의 명성은 대단했다.
 
아트 딜러이자 화이트 큐브 갤러리 소유주 제이 조플링(Jay Jopling)과 결혼으로 화제를 낳은후, 연일 파격과 논쟁의 작품을 내놓으며 예술계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녀의 사진 작품에는 노골적인 정사 장면과 노출은 기본이었다.) 여기에 의도치 않은 두번의 암투병을 겪어야만 했고, 제이 조플링과의 1조 5400만 달러의 이혼은 무수한 추측과 비화를 낳았다. 그리고 그녀를 영원한 이슈메이커로 만든 일이 벌어졌으니, 24살 연하인 영화배우 애런 테일러 존슨과 전격 결혼을 발표한 것이다. 대중들에게는 놀라운 사건 이었지만, 그와 그녀에게는 아름다운 사랑의 마침표였다.
 
'존 레논'이라는 위대한 뮤지션의 청춘을 연기하기 한다는 것은 애런 존슨 이라는 젊은 배우에게는 의외로 큰 부담감 이었다. 배우의 연기가 감독의 의도대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때, 누구나 윽박지르거나 압박하기 마련… 하지만 괴팍할 것 같았던 샘 테일러 우드는 애런 존슨을 매우 자상하게 대하고, 존 레논을 설명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에 대한 공감도를 맞추려 했다. 이러한 샘 테일러의 자상함에 애런 존슨은 또래 친구 못지 않은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 감정은 사랑으로 바뀌게 되었다.
 
[존 레논 비긴즈- 노 웨어 보이]를 촬영하는 애정을 키워온 연상, 연하 커플은 영화의 개봉과 함께 깜짝 약혼을 발표한다. 하지만, 매스컴과 사람들의 시선은 그들의 사랑을 결코 아름답게 보지 않았다. 24살 이나 어린 연하남의 아이를 임신한것에 대해 계획적인 임신 이었냐는 비아냥과 함께, 그녀의 작품관과 스캔들을 언급하며 정신관을 비꼬기도 했다.
 
이러한 주의의 싸늘한 반응 속에 한참 어린 남편 애런 존슨은 기자들과 팬들이 보는 공식 석상에 그녀를 데려와 과감한 애정 표현을 하며 샘 테일러 우드를 자신의 여자라 선언한다. 편견과 부정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당당한 사랑을 하고 있음을 모두에게 전한 애런 존슨은 더욱 어른스러웠고, 그 어느 커플들 보다 가장 아름다웠다.
 

비모범 사례

'논란의 중심' 로베르토 로셀리니 & 잉그리드 버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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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여인이었던 잉그리드 버그만.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는 그녀의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추락하게 된다. 로베르토 셀리니 감독의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을 연달아보고 큰 감명을 받은 버그만은 충동적으로 셀리니에게 편지를 쓴다. 그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내용으로 편지의 마지막에는 이탈리아어인 Tiamo(사랑해요) 라는 단어를 첨부했다. 그 후 편지속의 모든 내용은 현실화된다.
 
1950년 셀리니의 영화 [스트룸볼리]에 출연한 이후,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작품을 통한 순수한 사랑이었으면 로맨틱한 순간이겠지만, 문제는 이 둘이 모두 기혼자란 사실이었다. 스웨덴의 치과의사였던 남편과 어린 딸을 두고 있었던 버그만은 이 둘을 버리고 유부남이었던 셀리니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 사태는 버그만이 로셀리니의 아이까지 임신하게 되면서 더욱더 심화 되었다.
 
그 당시 보수적인 미국 사회는 버그만을 비난했고, 그녀의 조국 스웨덴을 비롯한 이탈리아 전 유럽의 영화팬들도 그녀와 로셀리니가 출연하는 영화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같은 여파 때문인지, [스트룸볼리] 이후의 출연작인 [유로파] [이탈리아 여행]은 버그만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했다. 세기의 불륜 사건으로 가족, 명예 그리고 재산 까지 잃은 그녀는 로셀리니가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면서 1958년 이혼하게 된다. 이제는 사랑마저 잃어버렸다.
 
영화 실패와 명예 실추로 빈털터리가 된 채 헐리웃에 돌아온다.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에 불구하고 동료들의 도움으로 다시 연기 생활을 이어간다. 이후 출연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가을 소나타]를 통해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멋지게 제기하게 된다.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끔찍했던 인생의 나락을 경험했지만, 이같은 결정에 그녀는 "후회하지 않는다" 라고 회고하며, "다시 태어나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것이다" 라고 말했다.
 
버그만의 행동은 윤리적인 시각에서 볼 때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다른 시각에서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의지를 따라간 이상적인 여성'으로 비치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 본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로 한 주변의 사람들을 가슴아프게 하는 이기적인 선택 이라면?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다.
 

'수많은 이혼사유를 남긴…' 가이 리치 & 마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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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뮤지션이자 배우로도 가능성을 본 아티스트 마돈나와 영국의 천재 감독 가이 리치의 결혼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였다. 10살 연상, 연하 차이라는 인식을 넘어 각 분야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받은 예술가들의 결혼이었기에 관심 만큼은 대단했다. 가이 리치의 출세작 [록 스탁 앤투 스모킹 베럴즈]의 주제곡을 마돈나가 부르게 되면서 인연이 되었고,  2000년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결혼 전 아들 로이 리치가 탄생해 아름다운 사랑의 행보를 이어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이러한 예상은 2008년 두 부부가 이혼하게 되면서 보기 게 빗나갔다.
 
이와 관련한 무수한 추측이 난무했다. 여러 의 이유가 알려지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사유는 마돈나의 복잡한 남자관계였다. 과거 배우 숀 펜과 결혼하고 이혼한 이후에도 여러 남자 스타들과 함께 언급된 염문설은 가이 리치와의 결혼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메이저리그 출신의 알렉스 로드리게스 였다. 마돈나는 언론의 끊이지 않는 로드리게스와의 염문을 부정했지만, 주변의 지인들은 이 문제가 이혼 과정까지 오게 된 큰 이유라고 전했다.
 
또한, 마돈나가 믿고 있었던 신흥 유대종교 카빌라에 대한 거부감 이었다. 카빌라의 특이한 성향에 이질감을 느낀 건 물론이고, 한가지 종교와 철학에 빠지기보다는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싶었던 리치의 바램도 있었다.
 
게다가 마돈나의 '상류사회' 진출과 관련된 욕심과 아이 육아, 입양 문제까지 겹치게 되면서 부부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평화롭고 평범한 가정을 유지하고 싶었던 리치의 바램과 달리 마돈나가 꿈꾸었던 가정에 대한 이상은 너무나도 컸었다.
 
이외에도 두 명사의 이혼은 무수한 사유와 이야깃거리를 만들며 아직도 회자 되고 있다.
 

(사진=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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