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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다옹] '저니맨' 최익성, 21년이 걸린 아버지와의 약속

야옹다옹 ㅣ 16.04.14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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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의 대표적인 '저니맨' 최익성(저니맨 야구육성사관학교 대표). 그는 자신의 야구 인생을 ‘기나긴 여행’에 비유했다. 최익성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렇게 힘든 길을 그것도 오랜 시간 동안 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야구를 그만두겠다 마음먹었을 때는 마치 기나긴 여행을 마친 여행자 같은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중학교 2학년이라는 늦은 나이에 야구를 시작한 그에게 세상은 혹독한 시련을 선물했다. 학창시절 야구를 하는 내내 ‘다르다’는 이유로 소외받았고, ‘부족했기에’ 외면받았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울 수도 투정을 부릴 수도 없었다. 

최익성은 강해졌다. 좋은 야구선수가 되길 원하셨던 아버지의 뜻과 성공하리라 다짐했던 자신의 꿈을 위해 피나는 개인 훈련에 매진했고, 지난 1994년 삼성에 신고선수(육성선수)로 입단했다. 

프로에 와서도 하루살이 인생을 살았던 그는 3년 차인 1997년 ‘20홈런(22개)-20도루(33개)’ 클럽에 가입하면서 팀의 주축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자신의 노력이 꽃을 피운 것 같아 감격스러운 생각마저 들었던 그에게 시련을 너무도 빨리 찾아왔다. 

1999년 한화로의 트레이드를 시작으로 LG(2000년), KIA(2001년), 현대(2002~2003년), 삼성(2004년)을 거쳐 SK(2005년)까지 역대 최다인 6개 팀을 거쳤다. 은퇴 후에도 미국과 일본, 멕시코의 독립리그 등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최익성이 자신의 야구 인생을 ‘기나긴 여행’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달인을 만나다-최익성 편’은 ‘1부-21년이 걸린 아버지와의 약속’와 ‘2부-저니맨 최익성의 청춘을 향한 외침’으로 나눠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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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2학년이라는 늦은 나이에 야구를 시작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은데.

최익성   “사실 나는 야구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순전히 아버님의 권유가 있었기에 시작하게 됐다. 어렸을 때는 집이 부유했고, 외동아들이었기 때문에 귀하게만 자랐다. 공부도 꽤 했다. 내가 운동선수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는 그 전까지 상상도 안 했다. 결국 야구를 시작하면서 야구부가 있는 학교에 가기 위해 2번이나 전학을 다녔다. 사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를 시작하고 프로에 가기 위해 노력한다. 뒤늦게 공부만 하다가 야구를 하겠다고 들어온 내가 다른 이들에게는 달갑게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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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갑게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최익성   “야구를 시작하면서 따돌림이나 집단 구타 등을 당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해내기 힘들 정도로 상처를 많이 입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감독님이 부모님을 모셔다가 ‘실력이 되지 않으니 야구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글자 하나를 더 배우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시며 쫓아내셨다. 아버님께서도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만하자’고 말씀하셨고, 나는 ‘1년 만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야구를 시작한 것은 난데, 누군가에 의해서 야구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만둬도 그 선택권은 나에게 있는 것 아니겠나. 그런 이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1년만 더 하고 야구 그만두겠다고 한 약속이 결국 21년이 흐른 후에 지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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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 큰 상처를 받았을 것 같다. 

최익성   “굉장히 슬펐지만,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스스로에게 ‘아버지가 지금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아들을 원할까. 꿈을 위해 땀을 흘리며 이겨내는 모습을 원할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정말 초인적인 힘이 나왔던 것 같다. 주변을 돌아보거나 나약해지지 않고 하루를 전쟁처럼 살았다. 매일 매일을 목표를 위해 하염없이 달리기만 했다. 슬픔을 운동장에서 풀어낸 것이다. 덕분에 스스로 더 강해질 수 있었고, 비록 신고선수지만 프로에도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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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그렇지만, 신고선수라는 신분은 불안하지 않나. 늘 기회를 갈구하고, 기회를 위해 성과를 보여줘야만 하는 자리인데.

최익성   “말이 좋아 신고선수지 사실 연습생이다. 프로에 들어 왔다는 기쁨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5~6개월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때 2군에 계시던 코치님이 오른손 타자인 나에게 왼손 타자로 전향할 것을 제안하더라. 내가 발이 빠르니 왼손으로 치면 1루에서 살 수 있는 확률이 늘어난다는 계산이었다. 그때는 나만의 스윙이 없었기 때문에 코치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왼손으로 치는 일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더라. 더욱이 오른손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기에 낮에는 코치님과 왼손으로 스윙을 하고, 밤에는 혼자서 오른손 스윙에 매진했다. 오른손으로 하되 나만의 타격법을 찾으면 충분히 승산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프로에 들어와서 겨우내 이중 타격을 하다 보니 스스로 지치기도 하더라. 하루는 (양)준혁이 형한테 찾아가서 ‘형, 정말 캄캄한 터널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아요. 도대체 내 스윙이라는 것을 찾고 벗어날 수 있을까요’라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때 형이 ‘너만큼 야구에 미친놈은 처음 본다. 너는 분명히 찾을 수 있으니까 포기하지 말라’고 힘을 줬다. 그래도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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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20(홈런)-20(도루)클럽에 가입한 기록을 보면 결국 최익성만의 타격을 찾았다는 얘기인데.

최익성   “겨우내 해도 헤매던 타격이었다. 그러다가 (1994년)4월에 당시 진해에 있던 LG 2군 구장으로 시합을 갔다. 시합 전에 연습을 하는데 무심코 휘두른 방망이의 스윙이 남다르더라. 정말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이거다’ 싶었다. 그때 코치님에게 가서 ‘오른손으로 승부를 보겠다’고 말씀드렸다. 결국 그 해 2군에서 타격왕을 차지했다. 말 그대로 나만의 타격을 찾고 자신감까지 충만했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너 언제 될 것이다’라고 미리 정해지고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 때문에 하루를 살면서 어떤 일이든 오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임해야한다. 정말 어이없는 순간에 내가 생각하고 그토록 원했던 스윙을 찾았지만, 그 이전의 처절한 노력이 없었다면 그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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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여전히 연습생 신분으로 프로에 들어온 선수들은 힘든 생활을 한다. 오랜 시간 동안 2군에 머물기만 한 선수들도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기도 한다. 조언을 해준다면.

최익성   “2군 애들의 가장 큰 불안감은 ‘팀에서 나를 자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온다. 그런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다. 팀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네 자신이 없어지는 것을 더 불안해하고 걱정해야한다. 막말로 내 것이 확실히 있다면 이 팀에서 나가서 다른 팀 문을 두드리면 된다. ‘언제 잘릴까’라는 생각에 고민하고 힘들어할 시간에 나만의 야구,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고 다듬는데 시간을 투자했으면 좋겠다. 나를 찾고 내 스스로의 가치를 올리는데 집중하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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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뒤늦게 야구를 시작했기에 남들보다 치열한 고민과 끈질긴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결국엔 강한 정신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은데.

최익성   “나도 내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 결국 내가 고양이 새끼인지 호랑이 새끼인지를 알려면 정글에 들어가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야구판이 내게는 정글 같은 곳이었고, 야구를 하면서 나도 내가 호랑이 새끼인 것을 알았다. 주위 사람들이 나를 압박할수록 나는 꺾이지 않고 더 단단해지더라. 물론 그랬기에 피해를 본 부분도 있지만, 나는 내가 살아온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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