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했던 프로그램 중 '영 파워 가슴을 열어라'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고등학생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옥상에 올라가서 '소리 지르며' 털어놓는 형식의 이 프로그램은 당시 청소년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프로그램의 취지는 "내 얘기를 좀 들어주세요' 였습니다. 전 국민이 '하하 호호' 웃으면서 보았던 이 프로그램은 그러나, 매우 불편한 진실을 뒤에 감추고 있습니다. 그만큼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방송까지 나와 친구들, 부모님, 선생님, 그리고 이 사회에 소리를 질러댔겠습니까? '제발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말이죠.
영화 [더 테러 라이브]의 범인 역시 '제발 나의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는 이유로 테러를 일으킵니다. 테러 직후 언론사를 통해 자신의 주장과 원하는 바를 풀어놓는 테러범의 모습은 88년, 최악의 방송사고로 꼽히는 '내 귀에 도청장치' 사건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MBC 9시 뉴스에 괴한이 난입해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소리지른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언뜻 '저게 말이 되는 설정인가' 싶으실 겁니다. 하지만 구구절절한 테러범의 사연을 듣다보면 어느새 '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뼈 빠지게 일하고도 터무니 없는 보수를 손에 쥐고, 없는 살림 쪼개서 세금을 내고 나면 한달 또 어떻게 살 지를 걱정해야 하는. 뉴스에서 연일 떠들어대는 '재벌 비리', '탈세 의혹' 등 부자들이 오히려 돈 안낸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분노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건 없는. 극단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영화속 '테러범'은 이 사회의 힘 없고 권력 없는 소시민들을 상징합니다.
한편 영화는 너무나 이기적인 현대인들의 세태와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국가 시스템을 함께 비판하고 있습니다. 잘 나가던 앵커에서 순식간에 라디오 진행자로 좌천된 윤영화(하정우 분)는 시종일관 재기 만을 노리고 있습니다. 마포대교 테러 사건이 터졌을 때 그는 이 것이 일생일대의 기회임을 감지합니다. 라디오 부스에서의 생중계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그는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 치밀한 눈치 싸움을 벌입니다. 문제는 정작 윤영화 자신은 후배 라디오 PD를 배신했다는 것입니다. "이거 대박이다"라는 윤영화 말만 믿고 방송을 준비했던 PD는 망연자실 합니다. 하지만 윤영화는 그런 PD를 모른척하죠.
국장(이경영 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입안의 혀처럼 굴던 국장은 윤영화가 지시대로 따르지 않자 최악의 방법을 사용해 윤영화를 극단적 상황까지 몰고갑니다. 마침내는 전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 생방송 중 후배의 치부를 공개 해 놓고 '시청률 70%'가 넘었다는 이유로 유유히 사라집니다. 결국 윤영화는 오전에 자신이 그랬던 것 처럼 국장에게 버림받게 됩니다. 나의 성공 앞에서 타인의 희생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현실을 영화는 너무나 날카롭게 꼬집고 있습니다.
김병우 감독은 기자 간담회에서 [더 테러 라이브]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시스템에 대한 비판' 이라고 말했습니다. 감독의 말 처럼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정부는 무능하고 오만하며 독선적입니다. 테러를 시작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테러범이 외친 것은 단 하나, '대통령의 사과'였습니다. 안타까운 희생은 결국 정부 탓이었으니 정부의 수장이 나와 진심으로 사과하라는 뜻이었죠. 하지만 국가는 이 요구에 응하는 대신 통보식의 협상을 시작합니다. 대통령 대신 스튜디오에 나온 '인물'은 우리 모두가 한 번쯤 들어보았던 말들을 내뱉기 시작하죠. '정부는 협상하지 않는다', '지금 자수하면 사정은 참작 해 주겠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아들 신상을 말해버리겠다' 등. 제발 내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시작한 테러인데 정부는 또 다시 귀 막고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데 급급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 어디에도 대통령의 모습은 없습니다.
수몰될 위기에 처한 마포대교에는 십여명의 사람들이 고립되어 있고 생방송을 진행하는 윤영화의 귀에는 인이어 폭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국민들이 인질로 잡혀있는 절체 절명의 상황에서도 국가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사상 최악의 섹스스캔들을 무마하고 재선에 성공하기 위해 언론을 조작, 가상 전쟁을 펼쳤던 영화 [왝 더 독]의 대사처럼 진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중이 좋아할만한 그림을 그려놓고 믿게 만들면 그것이 곧 진실이고 여론이 되는 것이죠. 그 앞에서 돈 없고 힘없는 개인 피해자는 그저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귀를 막아놓고 소통하는 척 했던 국가가 테러범을 만들어 낸 게 아닐까요? 과연 누구를 가해자고 누구를 피해자라고 말해야 할까요. 영화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배우 하정우는 이 영화에서 원톱 주연을 맡아 치밀한 심리묘사를 선보입니다. 영화의 장소적 배경은 '라디오 스튜디오'입니다. 밖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는 전화 한 대 밖에 없는 막혀있는 공간에서 윤영화는 보이지 않는 적과 숨막히는 심리전을 계속 해 나갑니다. 이 과정에서 윤영화의 감정은 시시각각 변합니다. 특종에 눈이 먼 앵커에서부터 귀에 인이어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공포, 사랑하는 여자가 마포대교에 고립된 것을 보고 있을 때의 무력감, 자신을 배신한 국장과 국가에 대한 분노 그리고 망연자실까지. '윤영화'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은 하정우를 통해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패닉 상태의 눈빛, 손 끝의 움직임 하나 하나까지 하정우의 모습은 없고 앵커 '윤영화'만 있을 뿐입니다.
한편 [더 테러 라이브]를 통해 상업 영화에 처음 데뷔한 김병우 감독 역시 뛰어난 스토리텔링과 연출력을 보여줍니다. 일반적인 영화처럼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 아닌 '전개'부터 시작하여 관객들을 몰아침에도 불구하고 부담스럽거나 억지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론을 생략하고 '본론'부터 이야기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쯤은 가져보았을 불만과 의구심들을 속 시원히 긁어주고 있습니다.
기자간담회에서 배우 하정우씨는 같은 날 개봉하는 대작(설국열차)과의 경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보람된 결과를 맞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답했습니다. 아마 하정우씨의 바람은 현실로 이루어 질 것 같습니다. 차별화된 주제의식과 배우의 소름돋는 열연은 관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평점:★★★☆
TV-VOD 평점:★★★☆
관객 취향: 부조리한 것들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는 당신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