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와이파이, 블루투스 그리고 CDMA 기술은 1940년대 발명된 기술에 의해 탄생될 수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원천이 된 통신 체계를 발명한 인물이 전문 과학자, 분야별 전문가가 아닌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여배우 헤디 라머라는 사실이다. 말 그대로 '서프라이즈' 한 사실이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이처럼 지금의 인류에 도움이 되는 발명을 했지만 그녀가 발명가가 아닌 여배우로만 알려져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은 인류의 문명 발전에 크게 기여한 그녀의 비하인드와 너무나도 영화 같은 인생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본명:헤드비히 에바 마리아 키슬러 (Hedwig Eva Maria Kiesler)
생년월일: 1914년 11월 9일~2000년 1월 19일 (85세 사망)
출생지: 오스트리아 빈
1. 화학을 좋아한 오스트리아 소녀
헤디 라머는 1914년 11월 9일 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안정된 가정에서 자란만큼 남부럽지 않은 문화적 혜택을 누리고 자랐으며, 이는 훗날 헤디 라머가 배우가 될 수 있었던 기틀이 되었다. 무난한 학교생활을 보낸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과목은 화학이었으며, 그녀의 가족과 주변인들은 만약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생활적 여건이 괜찮았다면 헤디 라머는 배우 대신 과학자가 되었을 것이라 말했다.
2. 데뷔부터 파격적이었던 그녀
십 대 때부터 남다른 외모와 몸매를 자랑하며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았던 그녀는 피아노와 발레를 공부하다 베를린에서 감독 겸 배우였던 막스 라인하르트에게 연기를 배우게 된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된 그의 눈에 들게 되면서 16세의 나이에 빈에 위치한 사차 영화사에 들어가게 된다. 1933년 18세의 나이에 영화 <엑스터시>로 첫 정식 데뷔를 갖게 된다. 이 작품을 통해 국제적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 영화가 당시 시대의 기준에서 볼때 너무나 파격적인 작품이었다는 점. 18세의 성숙한 소녀가 알몸으로 수영하는 장면이 무려 10분 동안 등장하니, 이 영화가 어떤 성향의 작품인지는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파격적인 누드와 오르가즘을 느끼는 표정까지 과감하게 묘사한 이 영화는 유럽 전역을 비롯한 미국, 아시아에까지 화제를 불러모으기에 이른다. 당연히 당시 보수적 사회를 대변한 유명인사와 정치인들이 이 영화에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냈는데, 그중에는 바티칸의 교황과 나치 히틀러도 포함되어 있었다. 참고로 히틀러가 이 영화에 반대 입장을 드러낸 이유는 작품이 선정적이어서가 아니라 헤디 라머가 유대인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3. 19세에 첫 결혼, 나치 남편 그리고 <프리즌 브레이크> 같은 탈출
▲해디 라머의 첫 남편 프리츠 맨들
<엑스터시>로 유명세를 알리게 되었지만,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던 헤디는 이후 다른 출연작을 통해 정식 배우다운 이미지를 구축하게 된다. 그리고 19세의 나이에 14세의 연상남 프리츠 맨들을 첫 번째 남편으로 맞이하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헨리 포드'라 불린 그는 군수업계의 거물인 동시에 독일 나치의 협력자로 절대 권력에 취해있던 야심많은 남자였다. 그는 이미 과거에 첫 번째 결혼을 한 적이 있으며, 헤디 라머는 그의 두 번째 아내였다. 그가 십 대인 헤디와 결혼하려 한 이유는 단 하나, 장식품과 같은 소유욕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연기 활동 같은 아무런 외부활동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채 집안에 갇혀 있어야 했으며, 남편을 따라 나치 관련 행사에만 참석해야만 해야 했다. 조국 오스트리아의 나치화에 대한 회의감과 자신의 꿈이 좌절된 것에 답답함을 느낀 그녀는 프리츠 맨들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하며 <프리즌 브레이크>같은 극적인 탈출을 감행하게 된다.
프리츠의 하녀들에 의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한 그녀는 어느 날 밤 집에 파티가 열리자 하녀와 함께 배정을 돕게 된다. 헤디는 자신과 닮은 하녀를 찾아 자신이 마시는 차에 수면제를 타고 하녀의 차와 바꾸어서 하녀를 재우게 된다. 그리고 나서 갖고잇는 보석들을 코트 안에 숨긴 뒤, 자고있는 하녀의 옷을 입은후 하녀들의 눈을 피해 집 밖을 나와 준비된 자전거를 타고 프리츠의 영지를 벗어났다. 빈의 야간기차를 탄 그녀는 친적이 있는 영국 런던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 있는 할리우드 영화관계자를 만나 미국 영화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P.S: 첫 번째 남편 프리츠 맨들은 이후에도 5번의 결혼을 하게 되고, 나치가 전쟁에서 패하자 점령지인 아르헨티나로 피신해 군수품 공장을 건설, 나치의 재건을 도우려 했다. 훗날 그는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되는 열성 나치 지지자 후안 페론의 조언자로 활동했다.
4. 헤디 라머라는 이름의 탄생
런던에서 할리우드 관계자를 만나기까지 그녀는 자신의 긴 오스타리아 네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녀의 할리우드 진출을 돕기로 한 MGM의 사장 루이스 B. 메이어는 미국인들에게 쉽게 각인되기 위해서는 좀 더 짧고 친숙한 이름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특별한 할리우드 진출명을 쓰기로 합의했다. 그녀의 첫 번째 이름 헤드비히의 '헤디'에 동경했던 무성 영화시대의 스타 바바라 라마의 라스트 네임을 딴 헤디 라마는 그렇게 탄생했다.
5. 할리우드 진출사
헤디 라머의 등장은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왔다. 이국적인 외모와 뇌쇄적인 눈빛은 치명적인 여인의 이미지를 불러왔고, 할리우드는 그러한 헤디 라머에게 어울릴법한 작품들을 제작했다. 헤디 라머는 당시로써 보기드문 최고의 섹시스타로 떠오르며 남성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여성들의 이상향이 되었다. <알제><붐타운><크로스로드><미인극장>은 1940년대 최고의 흥행성적을 기록한 영화였으며, 신인이었던 그녀는 라나 터너, 주디 갤런드와 같은 당대 최고의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이후 최고의 히트작인 <화이트 카고>를 비롯해 전설로 여겨지는 시대극 <삼손과 데릴라>는 그녀의 인기에 정점을 찍은 대표작이었다. 이렇듯 승승장구 하던 그녀의 전성기는 1950년이 시작되면서 내리막길로 이어졌고, 1957년 44세의 나이로 은막에서 은퇴했다.
6. <카사블랑카>에 출연할 뻔 했는데...
인기스타인 만큼 그녀에게 여러 작품의 출연 제안이 왔었다. 그녀가 출연을 거절한 작품중에는 전설적인 두 편의 작품이 있었는데, 재미있게도 두 작품 모두 라이벌과 같은 대상에게 돌아갔다. <가스등>과 <카사블랑카>가 바로 그 작품이었으며, 이 영화에 연속으로 출연한 행운아는 바로 잉그리드 버그먼 이었다. 두 편중 한편에만 출연했어도 헤디 라머의 전성기는 더 오래가지 않았을까?
7. 6번의 결혼과 이혼
그녀의 굴곡진 인생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복잡한 사생활, 결혼문제였다. 총 6번의 결혼과 이혼을 했을 정도로 인생의 진정한 사랑을 만나지 못해 오랜 시간 동안 방황해야 했었고, 그것이 그녀의 배우 활동에 큰 지장을 주게 되었다.
첫 번째 남편인 프리츠 맨들을 떠나 미국에 건너가 만난 두 번째 남편은 시나리오 작가이자 프로듀서인 진 마키였다. 프리츠 처럼 한참 연상이자 대머리에 배까지 나왔지만, 한없이 친절한 그에게 반해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진의 불륜으로 두 번째 결혼은 허무하게 깨지게 되었다. 세 번째 남편인 존 로더와 결혼해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듯 했으나 성격 차로 이혼했으며, 나이트클럽 경영자 테디 스타우퍼와 네 번째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이 또한 같은 이유로 오래가지 못하게 된다. 다섯 번째 남편은 석유 부호 하워드 리로 헤디 라머와 가장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한 대상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속된 부부생활이었기에 상처 또한 너무 클 수밖에 없었다. 하워드 리와 결혼 생활을 통해 얻은 집과 재산을 지키려다 오랜 법정 소송을 거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마지막 남편이자 변호사인 루이스 보이스와 재혼하지만, 이마저도 얼마 가지 못했다. 하워드 리와의 법정 소송 패소와 잇따른 이별로 더이상 남은 게 없었던 그녀가 50대가 된 시기에는 그 누구도 곁에 없었다. 1966년에는 가게에서 물건을 훔쳤다는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으며, 1991년에 플로리다에서 역시 절도죄로 조사를 받다가, 혐의가 인정되어 1년 동안 보호관찰 대상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이혼의 충격으로 성형 수술을 반복적으로 하다가 그 누구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얼굴이 변해 모두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한때 <사운드 오브 뮤직>의 저택을 소유했을 정도로 엄청난 부를 과시했던 그녀는 그렇게 외롭고 가난하게 늙어갔다. 그리고 2000년 1월 19일 첫째 딸 데니스의 55세 생일날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8. 그녀의 발명 절친 하워드 휴즈
▲세기의 재벌이었던 하워드 휴즈
학생 시절부터 화학이라는 과목을 좋아했을 정도로 과학과 발명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리우드에 진출하면서도 이 부분을 취미로 이어나갔다. 집안 창고를 실험실로 만들어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고 나서는 실험실에서 각종 발명과 과학 실험을 진행했다. 그만큼 그녀는 외모보다는 두뇌로 더 인정 받고 싶어했으며, 오늘날의 '원조 뇌섹녀'인 셈이다. 흥미롭게도 그녀의 이러한 열정을 돕고 지원한 이가 있었는데, 그는 다름아닌 하워드 휴즈, 영화 <에비에이터>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했던 바로 그 실존 인물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날개를 가진 헤라클레스를 직접 설계하고 완성한 세계적 부호였던 그는 이쁜 외모와 뛰어난 과학적 지식을 지닌 헤다 라머에게 큰 매력을 느꼈고, 그녀가 발명이 취미라는 사실을 알고 그녀의 취미를 적극 지원했다. 실험 장비를 직접 구해주며, 과학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로 서로에게 발명 동지였던 두 사람. 어느 날 하워드 휴즈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비행기를 고안해 냈지만, 막상 실제로 되지않아 헤디 라머에게 조언을 구했다. 휴즈의 설계안을 보던 헤디 라머는 사각형 날개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며, 그에게 공기 저항을 최소화 하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새의 날개의 유선형 모양을 예시로 들며 그 모양에 맞게 날개를 제작하라고 조언했다. 하워드 휴즈는 헤디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여러 비행기를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그녀의 아이디어가오늘날 항공기 시대의 장을 연 출발점이 된 것이다.
9. 와이파이의 원조 통신 기술을 발명한 비하인드
그녀의 이러한 창의적인 두뇌가 본격적으로 발휘되던 시기는 2차 세계 대전이 반발하던 1941년. 조국 오스트리아를 파시즘으로 물들게 한 나치를 증오했던 헤디 라머는 과학으로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하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독일군의 잠수함 유보트가 연합군의 함대와 유럽 피난민들의 민간선박을 잇달아 격침 시키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헤디 라머는 이 문제의 해결책이 잠수함의 원격조종어뢰에 있음을 간파하고 곧바로 연구에 착수하게 된다.
당시 어뢰는 무선통신방식으로 제어되는 탓에 쉽게 탐지되고, 제어를 방해당하는 문제가 있었다. 헤디 라머는 첫 번째 남편 프리츠 때문에 참석한 사업 미팅에서 얻은 어뢰 관련 지식을 활용해 작곡가 겸 작가이자 동료 연구자인 조지 앤틸과 함께 '주파수 도약(hopping)'을 공동 연구했다.
▲헤디 라머가 직접 설계한 주파수 도약 이론 (출처:The Law Office of Matthew M. Yospin)
주파수 도약이란 임의로 동기화된 주파수 대역 사이에서 주파수를 빠르게 바꿔가며 통신을 유지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용어를 말한다. 이들의 계획은 무작위로 피아노 건반을 쳐서 소리를 보내듯 제어소에서 어뢰에 88가지 주파수를 이용해 제어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들의 연구 결과는 1942년 미국특허 2,292,387번으로 등록된 '비밀통신시스템'으로 남아있다.
안타깝게도 이 기술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에서 채택되지 않았다. 당시의 군 장성들은 해디 라머의 이같은 노력을 이쁘장한 할리우드 여배우의 치기어린 상상이라 치부하며 "전쟁 승리를 위해 돕고 싶다면 전쟁 채권 판매 운동에 동참하라"라며 그녀의 아이디어를 무시했다. 이 아이디어는 1950년대에 CDMA라 불리는 무선통신기술을 발명한 민간 업체들에 의해 재조명됐고 현대에도 활용되는 셀네트워크, 블루투스, 와이파이에 녹아들었다.
해디 라머의 이같은 공적은 1997년 들어서야 세상에 알려졌고, 그해 미국 전자프론티어재단(EFF)과 오스트리아 등으로부터 여러 과학 관련 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 특허권은 1959년 만료돼, 2000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발명으로부터 인해 생긴 어떠한 이득도 받지 못했다.
P.S: 비록 군에게 무시당했지만, 그녀는 연합군의 승리를 위해 전쟁 채권 운동에 적극 동참했고, 무려 7백만 달러의 금액을 모으기에 이른다.
10. 발명계의 오스카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
해디 라머가 1997년 아들을 통해 대리로 받게 된 상은 발명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BULBIE Gnass Achievement Award' 라는 상으로 국제적으로 가장 큰 명성을 지닌 평생 공로상이었다. 해디 라머는 이 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사후 14년 후인 2014년에는 '국립 발명가 명예의 전당 (National Inventors Hall of Fame)' 회원으로 입회되었다.
11. 직접 자기 영화를 제작한 여배우
앞서 소개한 발명 사례에서 봐왔듯이 해디 라머는 큰 야망과 도전을 꿈꿔온 사람으로 자신에게 고정된 이미지의 캐릭터 제안이 들어오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한정적인 배역에 한계를 느낀 그녀는 스스로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지금과 달리 여배우가 영화 제작에 나선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너무나 드문 일이었기에, 해디 라머의 영화 제작은 큰 화제를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1946년 제작된 <더 스트레인지 우먼>, 1947년 영화 <디스아너드 레이디>, 1954년 이탈리아에서 제작한 <파리스의 연인>은 해디가 맡고 싶었던 여성 캐릭터들이 담겨진 영화였다. 세 편의 작품 모두 보기 좋게 흥행에 실패했고, 이로인해 해디 라머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되지만, 남성중심적 할리우드 사회에 여성의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을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
12. 디즈니의 백설 공주와 DC 캣우먼의 모델이었던 그녀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해디 라머의 패션을 참고한 앤 해서웨이
아름다움과 특유의 용기를 지닌 그녀의 모습은 아티스트들에게 큰 영감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이국적인 동시에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해디 라머의 외모에 반한 디즈니의 에디터들은 그녀를 토대로 <백설 공주> 그림을 완성했다. 발명과 도전을 멈추지 않는 그녀만의 자신 있는 행보를 눈여겨본 만화 '배트맨'의 원작자 밥 케인은 그녀를 모델로 캣우먼 캐릭터를 완성하게 된다. 훗날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출연한 앤 해서웨이는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캣 우먼만의 멋진 개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이 캐릭터의 모델이었던 해디 라마의 모든것을 연구했다"라고 말했다.
13. 구글(Google)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녀
세게 최고의 글로벌 회사 구글은 2015년 11월 19일, 그녀의 101번째 생일을 기념해 구글 메인 화면에 그녀를 향해 경의를 표하는 영상을 올리게 되었다. 구글에게 있어 해디 라머는 일종의 '락스타' 같은 존재와도 같다. 현재의 통신 기술에 기초한 위대한 발명을 했기에 그녀가 없었다면 사실상 구글도 없었던 셈이다. 헌정 영상을 제작한 구글의 수석 디자이너 제니퍼 홈은 "해디 라머는 우리 시대에 있어 신화같은 존재로 기억되어야 한다. 우리는 종종 과학 기술 분야에서 여성들이 이뤄낸 업적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1940년대 할리우드 스타가 발명한 기술은 오늘날 스마트폰 사용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녀가 남긴 업적과 인생을 공유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구글이 제작한 해디 라머 헌정 영상
14. 그녀의 전기 영화 <밤쉘>
오는 6월 7일 개봉예정인 <밤쉘>은 우리가 몰랐던 그녀의 과학적 업적과 비하인드를 담은 다큐멘터리로 <델마와 루이스>를 통해서 진보적인 여성 캐릭터의 등장을 알린 여배우 수잔 서랜든이 제작해 큰 의미를 더했다. 여배우이기 이전에 위대한 발명가인 그녀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진정한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었던 한 인간의 안타까운 사연을 담은 이야기인 만큼 지적인 재미와 깊이 있는 감동을 전해줄 의미 있는 작품으로 남겨질 것이다.
자료제공: 영화사 그램(gram)
그외 자료 참조: pbs.org, dogwoof.com, segulamag.com, IMDB 트라비아, 씨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