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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비하인드] 키스로 전남친을 죽일(?) 뻔했던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 1부

최재필 ㅣ 17.08.11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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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역사에 길이남을 섹스 심벌이자 무수한 스캔들과 비하인드를 남긴 여배우 마릴린 먼로와 관련한 흥미로운 뒷이야기들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이름: 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
본명: 노마 진 모턴슨(Norma Jeane Mortenson), 노마 진 베이커(Norma Jeane Baker)
신장: 166cm
생년월일: 1926년 6월 1일
출생지: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1. 본명이 노마 진? 슬픈 가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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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대 시절의 노마진 (출처:NY Daily News)

그녀의 진짜 이름은 마릴린 먼로가 아니었다. 1926년 6월 1일 태어났으며 이름은 노마 진 이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노마 진은 자신의 아버지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출생신고서에 기록된 아버지의 이름은 어머니가 허위로 기재한 이름이었고, 아버지조차 누구였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글레디스의 남자관계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화학약품을 다루는 일을 하던 글레디스는 노마 진이 일곱 살이 되던 해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유일한 혈족이었던 외할아버지 역시 정신병원에 수감된 상태였고, 증조부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노마 진은 양부모의 손에 길러지게 되고, 그녀의 과거사를 알게 된 할리우드 기획사는 어떻게든 그녀의 가족사를 숨기려 했다. 희대의 스타가 정신병자의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복잡해지기 때문이었다. 


2. 16세에 첫 결혼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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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남편 짐 도허티와 함께

마릴린 먼로는 지금까지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 첫 번째 결혼은 1942년 16세의 나이였으며, 남편은 항공사 정비공으로 일하던 21세의 청년 짐 도허티였다. 양부모가 사정에 의해 더이상 노마진을 양육하기 힘들어지자, 16세가 된 그녀를 좋은 남자와 결혼시키기로 했고, 성실하고 착하기로 소문난 짐을 짝으로 맺어주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잘 유지해 나가려 했으나,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짐이 군에 징집되면서 노마 진은 자연스럽게 혼자가 된다. 


3. 정식 데뷔는 누드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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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대 시절의 노마진 (출처:Frank's Reel Reviews)

전쟁터로 떠난 남편을 대신해 홀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군수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1944년 어느 날 공장에서 군수품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내세운 선전 사진 모델을 구하려 하자 노마 진은 바로 이 오디션에 지원해 모델로 데뷔하게 된다. 일당 5달러짜리 일이었지만, 대부분의 사진이 누드와 같은 선정적인 이미지가 강한탓에 노마 진의 사진은 군인들과 군수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노마 진은 사진작가인 앙드레 드 디앙과 그의 조수인 윌리엄 번사이드와 번갈아 가며 바람을 피우게 된다. 전쟁이 끝난후 제대한 남편 짐 도허티와 곧바로 합의 이혼을 한 노마 진은 본격적인 연예계 진출을 꾀하게 되고, 이때부터 긴 생머리를 자르고 금발로 물들인 후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4. 처절하고 애달픈 할리우드 데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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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스타들처럼 곧바로 스타가 된 것은 아니다. 누드모델 출신 이었던 탓에 연기적인 부분에 큰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 그녀는 데뷔때부터 대사 몇 마디만 건네는 엑스트라 연기만 전전했다. 그녀가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남들과 달랐던 육감적인 몸매뿐이었다. 성공을 그녀는 나이 많은 할리우드 제작자 들과 은밀한 관계를 나누기도 했지만, 제작자들 모두 그녀를 하룻밤 파트너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그녀와 관계를 가진 제작자들 중에는 조 솅크, 프레드 카거와 같은 유명한 사람들도 있었다. 


5. 그녀를 구원한 30살 연상의 순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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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마릴린 먼로를 구원한 이는 할리우드 에이전트였던 자니 하이드 였다. 그는 마릴린 먼로보다 30살이 많은 나이든 남성이었지만, 금발 미녀에 육감적인 그녀에 푹 빠져 조강치처였던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마릴린 먼로를 성심성의껏 도왔다. 자니의 도움으로 일개 단역 이었던 마릴린은 할리우드 스타들 못지않은 대접과 지원을 받게 되고, 문제가 되었던 연기력을 보완해 1949년 [러브 해피], 1950년 [아스팔트 정글]과 [이브에 관한 모든 것]의 비중 있는 배역으로 출연하게 된다. 

그녀가 배우로서 성공하자 자니 하이드는 마릴린 먼로에게 정식 청혼을 하게 되지만, 배우 활동을 지속하고 싶었던 그녀는 자니의 청혼을 거절하게 된다. 그녀와 헤어지는 와중에도 자니는 먼로에게 매우 중요한 진심 어린 조언을 남기게 된다. "제작자, 감독들과 관계를 맺고 자는건 좋지만, 절대 원치 않은 임신은 하지마." 얼마 안 가 자니 하이드가 지병인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자, 먼로는 자살 시도를 할 정도로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6. '플레이보이' 창간호의 첫 모델이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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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독특한 형태의 매거진을 창간하고 싶었던 청년 휴 해프너는 지인으로부터 마릴린 먼로가 군수 공장 시절 촬영한 사진을 입수하게 되고, 곧바로 이 사진을 메인 커버로 한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 창간호를 발간하게 된다. 당대 최고의 라이징 스타의 누드였기에, 잡지는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휴 해프너가 이같은 사진을 공개하기까지에는 복잡한 비하인드가 있었다. 

마릴린 먼로가 [아스파트 정글] 이후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백치미를 부각한 여러 작품에 캐스팅돼 스타가 되자, 그녀가 무명 시절 촬영한 누드 사진를 보관한 사람들이 이를 남몰래 팔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섹스 어필한 배우라 할지라도 불건전한 일을 했다는 것은 당시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마릴린 먼로에게는 예상치 못한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이 위기를 정면돌파하기로 결심한다.

누드 사진과 관련한 논란에 그녀는 "당시 전당포에 맡긴 차를 찾기 위해 50달러가 필요했는데, 그 정도의 돈도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라고 눈물로 고백하자, 대중들은 그녀의 사연에 공감하며 면죄부를 던져주기 시작했다. 여기에 평소 육감적 매력을 자랑하던 그녀였기에, 대중들은 그녀의 누드 사진에 열광했다. 

때마침 마릴린 먼로의 전성기와 같은 [돌아오지 않는강][나이아가라][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등의 화제작이 연달아 개봉하게 되면서 그녀에 대한 호의적인 분위기가 이어지게 되자, 휴 해프너는 플레이보이 창간호에 맞춰 누드 사진을 공개하게 되었다. 생계를 위해 찍은 5달러짜리 사진이, 누군지도 모른 한 청년을 백만장자로 만들어 준 계기가 된 순간이었다. 


7. 말 많던 조 디마지오와의 두 번째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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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마릴린 먼로는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타자 조 디마지오와 결혼을 하게 된다. 조 디마지오는 1941년 ‘56경기 연속안타’로 미국 메이저리그 120년 역사의 ‘3대 기록’ 중 하나를 내며, 뉴욕 양키스에 10차례나 월드시리즈 우승을 안긴 선수였다. 2차 세계 대전에는 직접 참전해 남다른 애국심도 갖고 있어, 미국인에게는 만인의 영웅이자 당대 최고의 스타였다. 영화계와 스포츠계의 당대 최고 스타들의 결혼이란 점에서 둘의 결혼은 큰 화제가 되었다. 당시 디마지오는 39세였으며, 마릴린 먼로는 이보다 12살 어린 27세였다. 은퇴한 야구선수 남편과 한참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배우 아내의 상황이 온전할 리 없었다. 수많은 남성 팬들의 환호와 남자 배우들과의 스킨쉽에 조 디마지오는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럴 때 마다 사사건건 그녀의 일상에 개입했다. 자유분방한 먼로와 달리 조 디마지오는 가족관의 관계를 엄숙하게 따지는 이탈리아계 남성이었다. 먼로의  그 때문에 두 사람은 자주 충돌했고, 불화설 또한 심심치 않게 제기되었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에 종지부를 찢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8. 이혼을 불러온 [7년 만의 외출]의 명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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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9월 10일 새벽 2시 뉴욕, 마릴린 먼로는 [7년 만의 외출]이라는 영화 촬영에 참여했고, 그 유명한 지하철 통풍구에서의 노출신을 선보이게 된다. 새벽의 시간대에도 불구하고 섹시한 마릴린 먼로의 노출연기 소식에 4,000여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들었고, 마릴린 먼로는 대중들 앞에서 15번이 넘는 노출을 선보였다. 대중들의 열광하는 소리는 호텔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조 디마지오를 분노케 했고, 결국 촬영이 끝나고 돌아온 마릴린 먼로에게 폭력을 가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난투극에 호텔은 큰 난리를 겪게 되었고, 먼로는 얼굴의 멍든 자국을 숨기기 위해 짙은 화장을 해야만 했다. 결국 결혼한 지 287일 만에 두 사람은 이혼을 하게 된다.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결혼 생활이었지만, 조 디마지오는 헤어진 가운데도 "나는 여전히 마릴린을 사랑한다."라며 그녀를 향한 변함없는 애정을 드러냈다. (마릴린을 향한 그의 사랑과 관련한 비하인드는 2부에서 언급하겠다.)


9. 신혼여행 기간에 방문한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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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디마지오와 결혼한 시기, 두 사람은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가게 되는데, 마침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들을 위로하는 공연에 와달라는 정부의 요청까지 받게 된다. 사람들의 요구를 최대한 받아주는 의외의 친절함을 지닌 마릴린 먼로는 조 디마지오와 첫날 밤도 치르지 못하고 곧장 한국으로 오게 되고, 그녀의 위문공연은 대구 동촌 비행장에서 진행되었다.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보러온 수많은 미군을 향해 마릴린 먼로는 노래하고 춤추며 그들을 위로했고, 그 모습은 전 세계 언론에 소개된다. 먼로는 4일간 한국에 머물며 10차례 공연을 펼쳤다. 당시 그녀를 환영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파가 대구 동촌비행장에 모여 일대 소동이 벌어졌으며, 국내 영화 배우인 백성희와 최은희가 그녀를 마중 나가 환영했다. 두 여배우의 환영에 반가움을 느낀 마릴린 먼로는 두 사람과 팔짱을 끼며 다정하게 환영을 받았다. 훗날 먼로는 자서전에서 당시의 공연을 회상하며, "한국은 매우 인상 깊은 나라였다."라고 회고했다. 

P.S: 신혼 여행 도중 위문공연을 가게 된 이때부터 조 디마지오와 마릴린 먼로의 관계가 삐그덕 거렸다는 비화가 있었다. 

▲한국 방문 위문공연을 선보인 마릴린 먼로

▲군부대 탱크를 탄 모습


10. 토니 커티스와 죽음의 키스를 한 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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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마릴린 먼로는 할리우드의 유명 남자 배우들과 스캔들을 뿌리고 했는데, 그 중에는 1959년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함께 호흡한 토니 커티스가 있었다. 그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서구의 사람들에게 금지된 단어까지 표현하며 "마릴린과의 키스는 히틀러와 키스하는 것 같았다."라며 당시의 키스신이 너무나 괴로웠다고 표현했다. 

왜 이렇게 감정적으로 표현한 것일까?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영화를 찍기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다 못해 사랑하는 연인 사이었지만,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 깨지고 만 것이다. 

서로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남은 상황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으니, 서로에 대한 감정이 좋을리가 없었다. 결국, 문제는 영화의 막판 키스신에 터져버렸는데 토니 커티스는 당시의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키스신 촬영에서 마릴린이 너무 강하게 들어오더니 혀를 내 목구멍까지 밀어 넣어서 나를 질식사 시키려 했다. 정말 끔찍한 순간이자 내 생애 최악의 키스신이었다."


더 많은 비하인드는 2부에서 계속...

자료 참조: IMDB 트라비아, Telegraph, Buzzfeed.com


최재필 기자 (보도자료/제휴 문의/오타 신고) movierising@hrising.com
 

(사진=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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