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2016]
감독:박찬욱
출연:김민희,하정우,김태리,조진웅
줄거리
어릴 적 부모를 잃고 후견인 이모부(조진웅)의 엄격한 보호 아래 살아가는 귀족 아가씨(김민희). 그녀에게 백작이 추천한 새로운 하녀가 찾아온다. 매일 이모부의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이 일상의 전부인 외로운 아가씨는 순박해 보이는 하녀에게 조금씩 의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하녀의 정체는 유명한 여도둑의 딸로, 장물아비 손에서 자란 소매치기 고아 소녀 숙희(김태리).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될 아가씨를 유혹하여 돈을 가로채겠다는 사기꾼 백작(하정우)의 제안을 받고 아가씨가 백작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하녀가 된 것. 드디어 백작이 등장하고, 백작과 숙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가씨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하는데…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원작 [핑거스미스]가 일제강점기 시대의 조선을 배경으로 재탄생 되리라고는 그 누가 예상했을까? [아가씨]는 지구 반대편 세상의 이야기를 강점기 시대와 박찬욱 감독만의 개성으로 완벽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충분하다. 한편으로 이 작품은 그만의 전매특허와 같은 개성이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일종의 '경고' 신호처럼 느껴졌다.
[아가씨]는 박찬욱 감독 특유의 영상미와 시각화를 좋아하는 관객의 시선에서 영화를 본다면 눈이 즐거운 작품이다. [아가씨]의 장소는 강점기 시대를 대변했던 '경성'을 떠나 노골적인 왜색이 짙은 일본식 건물, 정원, 일본 현지를 배경으로 두고 있다. 그만큼 한국 영화를 모르는 해외 관객의 시선에서 이 영화를 보려 한다면 일본 영화로 오인하기 쉬울 정도로 일본적인 색채가 강하게 묻어나 있다.
영화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다시피 한 일본어 대사, 기모노 의상, 다다미방, 일본식 인형이 [아가씨]의 미장센을 구축하는 요소들이 되고, 일본 특유의 성(性) 문화가 영화의 주소재로 사용된다. 여기에 칸 영화제에서도 논란이 된 수위 높은 두 여성의 베드신, 이를 묘사한 노골적인 대사와 춘화가 적나라하다시피 등장해 이질감을 느끼게 할 정도다.
이것만 놓고 봤을 때 [아가씨]는 남성들의 판타지를 충족하려 한 성인영화로 착각하기 쉽지만, 박찬욱 감독 특유의 연출 관과 만나면서 매혹적인 레즈비언 영화의 특성을 드러낸다. 지나치게 성적인 묘사가 강한 에로 영화로 볼 수 있는 [아가씨]의 레즈비언 로맨스는 군국주의와 강점기 시대에 묻어난 억압된 사회를 벗어나려 한 독립적인 의미를 강조하며 의미심장한 주제관을 드러낸다.
강점기 시대의 표상을 은유적으로 비꼰 남성 캐릭터들에 대한 설정이 대표적이다. 야설 낭독을 통해 성적 욕망을 채우는 신사들, 타인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본능을 키우는 코우즈키(조진웅), 우월감에 찌든 채 허세를 부리는 사기꾼 백작(하정우)은 당시의 시대상에 가려진 남성우월주의의 추악한 이면에 대한 적나라한 풍자와도 같다.
[아가씨]의 두 여성은 이러한 남성들에게 수탈당하다싶피 한 존재들로(이모부에 이용당하는 아가씨, 사기꾼의 계획에 사용되는 숙희) 서로에 대한 공통점을 발견하고 '끌림'을 느끼며 은밀한 연인으로 발전된다. 그리고 이는 곧 둘의 자유를 위한 갈구로 이어진다.
[아가씨]와 박찬욱 감독의 장기는 바로 이 두 여성의 '끌림'을 표현하는 대목에서 빛나게 된다.
특유의 영상미, 화려하고 아름다운 세트와 배경, 인물의 내면을 부각한 내면 연기, 재치있는 대사가 조화를 이뤄내며 극 중 캐릭터들의 내면을 강하게 담아낸다. 백작과 코우즈키의 캐릭터가 일관된 개성을 유지하는 반면 아가씨와 숙희는 다양한 성격과 관점을 지니고 있어 그들의 모든 행동에 감정과 의미를 내포시키고 있다.
그 때문에 인물들의 표정과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클로즈업 촬영방식을 사용하며, 두 여배우의 연기에 주제와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암시한다. 섬세한 심리 묘사, 공간과 사물에 상징성이 담겨있는 순간도 바로 두 여성만이 존재하는 장면에서 빛난다.
서로의 신체를 만지고, 알몸을 바라보며, 의상을 빌려 입고 은밀한 감정을 교류하는 섬세한 움직임 하나까지 포착하며 이 모든 것을 의미심장하게 담으려 하는 과정은 [아가씨]만의 세밀함이 돋보이는 장면들이다. 관심, 질투, 애정으로 이어지는 감정적인 과정은 서로의 욕망을 드러내는 베드신에서 감정의 분출로 이어진다. 내면의 묘사에 그칠 뻔한 영화가 이를 통해 본모습을 드러낸 결정적인 순간이다.
베드신은 육체적인 만남을 갈구한 욕망인 동시에, 사랑, 우정 그리고 해방의 의미가 강렬하게 담겨 있다. 남성들에게 행해진 변태적 도구를 자신들의 애정 행위에 사용하는 장면은 그러한 욕망과 해방에 대한 욕구를 완벽하게 보여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김민희와 김태리는 여성 특유의 애민한 감정과 행동으로 두 여자의 심리와 애정을 섬세하게 연기하며 파격 로맨스의 수위를 적절하게 조절한다.
파격적인 순간에도 상징적인 영상과 미장센을 통해 모든 장면을 강렬하게 담아내는 [아가씨]는 전자에 언급한 남성들의 성적 본능을 은유적으로 그려낸 대목에서도 이같은 묘사 방식을 취하지만 이는 추악한 본성을 표현하는데 그친다. 아름다움과 추악함 이라는 극단의 공존을 통해 [아가씨]는 인간이 지닌 성적 판타지와 본능을 이같이 정의하며 독특하고 자극적인 세계관을 완성한다.
[아가씨]는 전개방식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 취한 인물의 시점을 통한 전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제1부가 숙희의 시선이라면, 2부는 아가씨의 시선을 유지하다 마지막 3부에서 전형적인 시점을 취하는 형식을 취하며 각 인물이 지닌 내면을 이야기와 조화 시키려 한다.
하지만 지나친 자기 세계관에 대한 과시 때문이었을까? 144분의 상영시간에 가장 빛나는 순간이 장면과 묘사에만 맞춰졌다는 것은 이 영화가 기본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과 설정에서 한계를 드러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을 비롯해 전작인 [박쥐][스토커] 또 한 표현과 인물 내면 묘사에 치중되어 있었지만, 팽팽한 위기감과 긴장감이 존재해 영화의 기본적인 흥미를 유지하며, 대중적인 성공도 보장될 수 있었다.
반면 [아가씨]는 매혹적인 묘사만 담겨 있을 뿐 그러한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반전의 반전이 등장하지만 예측 가능한 과정으로 이어지며, 그다음 이어질 극적인 전개 과정 또한 진행되지 않아 이야기의 심심함을 느끼게 한다. 섬세하고 치밀한 박찬욱의 영화가 외형에만 치중한 탓인지 내형을 제대로 보지 못한 허점을 드러낸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 대립구도의 부제에 있다.
[박쥐]가 흡혈귀가 된 두 사람의 윤리적인 갈등, [스토커]가 가족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을 대립관계로 삼은 반면 [아가씨]의 대립 구도는 불분명하다. 사기꾼 백작과 두 여성이 대립하는 관계지만,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라쇼몽]식 전개 방식을 따르면 두 여자 사이도 충분한 대립관계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이마저도 무시된다.
[아가씨]는 초반 전개에서 단순한 레즈비언 로맨스로 이어질 뻔한 관계를 반전 시킬 수 있는 설정을 드러내 이야기 전개의 흥미를 높여주며, 스릴러 특유의 긴장감을 추구하는 구도로 나아가지만, 로맨스에 초점을 두고 싶은 의도로 인해 용두사미가 되어버리고 만다. 묘사와 뻔한 관계 설정에 의미를 둔 연출력으로 이야기에 흥미를 살리지 못해 두 여자의 로맨스도 별다른 큰 감흥과 공감을 불러오지 못한다.
[아가씨]는 박찬욱의 영화팬이라면 그가 완성한 숨겨둔 코드같은 은유와 상징을 발견하는 재미를 느낄만한 로맨스지만, 장르적 재미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다소 모호하게 느껴질 만한 작품이다. 파격적인 레즈비언 로맨스 묘사와 베드신은 국내 영화에서 보기 드문 강도 높은 묘사와 수위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많이 언급될 장면이기에 파격적인 면에서는 영화를 본다면 재미있게 느껴질 것이다.
[아가씨]는 6월 1일 개봉한다.
작품성:★★★☆
오락성:★★☆
연출력:★★★
연기력:★★★☆
총점:★★★
최재필 기자 (보도자료/제휴 문의/오타 신고) movierising@hrising.com
(사진=CJ엔터테인먼트/모호필름/용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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