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목소리를 좀 들어주세요. 여자야구를 위한 길입니다."
2016 세계여자야구월드컵이 한창인 지금, 이 축제를 즐기고, 누구보다 반가워해야할 여자야구연맹 소속 선수들이 대회 보이콧에 나섰다. 최수정 전 여자야구연맹 국제이사(나인빅스 감독)는 "정진구 여자야구연맹 회장을 비롯해 일부 임원들의 원칙과 기준없는 대회운영 및 재정운영에 동의 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한국여자야구연맹 전체 46개 팀 가운데 41개 팀의 대의원(여자야구 각 팀별 감독들로 구성)이 팀원들의 뜻을 모아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를 구성해 '세계여자야구월드컵을 거부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내고, 내부고발에 나섰다. 최 전 이사는 "대회에 참가해서 열심히 뛰고 있는 동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대로 간다면 여자야구연맹에 미래가 없다"고 말했다.
'누구를 위한 축제인가'
문제는 세계여자야구대회월드컵 국가대표 선발과정에서 불거졌다. 연맹은 지난 3월 여자야구선수 30명을 기반으로 한 국가대표 상비군을 구성했다. 실업팀이 없는 한국여자야구 특성상 대부분의 선수들이 생업에 종사하고 있어 매주 주말마다 훈련에 나섰다. 20명이 정원인 엔트리에 들기 위해 많은 선수들이 상비군 탈락과 합류를 반복하며 대회 준비에 열을 올렸다.
그러던 와중에 연맹이 선수 선발을 앞두고 속내를 드러냈다. 연맹은 지난 6월 29일 장진구 회장을 필두로 한 선수 선발 위원회를 구성해 대회 엔트리를 위해 야구선수 10명만을 선발했다. 나머지 10명은 연맹소속이 아닌 소프트볼 선수로 채웠다. 이는 이사회를 통한 공식적인 의사결정이 아닌 비공식적으로 이뤄졌다. 비대위 측은 국가대표 선발 과정에 대한 문제 제기를 위해 지난달 11일과 20일에 임시대의원총회 소집을 요구했으나, 정진구 연맹 회장은 이를 거부했다.
최수정 전 이사는 "연맹 쪽에서 소프트볼 협회와 6월 중순에 MOU를 맺으면서 선수 10명을 받기로 확정 지었다. 이미 그 전부터 선수 수급문제와 관련해 소프트볼과 협의 중인 정황들이 있었다. 연맹에 국제 이사로 있었기에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어 대의원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양해를 구해야 한다고 정진구 회장을 설득시켰지만,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도무지 연맹과 함께할 수 없어 국제이사직까지 그만두게 됐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연맹 측에서는 "여자야구대표팀 전력 보강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비대위 측은 "언 발에 오줌 누기일 뿐"이라고 맞섰다. 김세인 여자야구연맹 감사는 "지난 2014년 8월에 대회 유치 결정이 났다. 2년이라는 준비 과정이 있었다. 이미 2008년과 2010년에 국제대회에 참가하면서 실력 차이를 느껴 오랜 기간 손발을 맞춰야만 큰 무대에서 승산이 있다는 것을 선수들도 연맹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대의원들은 대회 유치 확정 후 선수 육성과 실력 향상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매번 묵살 당했다"면서 "대회 성적이 목표였다면, 그에 맞는 준비를 했어야한다"고 강조했다.
여자야구 선수들에게 세계대회 유치는 꿈이었다. 김세인 감사는 "예전에 일본이나 캐나다 등 국제대회를 다니면서 '여자도 저렇게 야구를 잘할 수 있구나'라는 것을 보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국내에 세계대회가 유치가 된다면 좀 더 많은 선수들이 경기장에 찾아와 수준 높은 야구를 접하면서 느끼고, 배우는 것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면서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누구를 위한 축제인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비대위의 우려와는 달리 연맹 측은 '이번 대회를 통해 여자야구의 저변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여자야구연맹에 미래는 없다'
사실 연맹과 비대위에 속한 대의원들의 갈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김세인 감사는 "우리는 돈이 없는 단체다. 2007년에 연맹이 출범할 때부터 재정자립을 위해서 노력했다. 선수들은 매년 3만원의 선수 등록비를 냈고, 팀 단위로 매번 경기 참가등록비 10만원을 연맹에 납부했다. 새로운 팀이 창단됐을 때에는 연맹발전 기금식으로 100만원을 내고 있다. 매년 조금씩 모아 10년 동안 1억이라는 기금을 조성했다. 이것은 온전히 연맹의 재정자립을 위한 기금이라 통장도 별도 관리했다. 이사회를 거치지 않고는 손댈 수 있는 돈이 아니다"면서 "하지만, 지난해 정진구 회장이 부임하고 나서 기금이 줄었다. 이사회와의 협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기금에 손을 댄 것이다. 문제를 따졌을 때에는 '연맹이 돈이 없어서 썼다'는 말만 했다. 아무리 감사를 해도 연맹은 법외 단체이기 때문에 '시정하라'고 경고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실제 감사 자료를 살펴본 결과 정진구 회장 부임 후 불과 1년 만에 연맹 기금이 1억1500만원(2014년 12월 기준)에서 6511만원(2015년 12월)으로 줄어든 것을 확인해볼 수 있다. 김 감사는 "자체 중간 감사를 시행하기 위해 지난 6월 내용증명을 요청했지만,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자료를 제출했다.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여자야구연맹을 관리, 감독해야 할 상급기관의 대한야구협회도 유명무실하다. 현재 대한야구협회는 전임 회장들의 자금 운영 문제로 지난 3월 25일 통합체육회 이사회로부터 관리단체로 지정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진구 회장이 야구협회 관리위원장을 맡고 있어 본인이 본인을 관리, 감독해야 하는 상황이다. 최수정 전 국제이사는 "오죽 답답하면 대한야구협회 자유게시판에 '정진구 관리위원장님, 정진구 여자야구연맹 회장이 임시 대의원총회를 거부하는데 어떻게 할까요'라고 글을 올렸다"고 답답해했다.
정진구 회장은 연맹 회장으로 부임하면서 '사단법인화를 통한 투명한 행정관리 및 연맹의 재정 건전성 강화'를 약속 한 바 있다.
‘결국엔 소통’
세계여자야구월드컵 대회 기간 중 잡음이 일어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비대위 측도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최수정 전 이사는 "우리 팀에서도 대표팀에 차출 된 선수가 있다. 대회를 뛰고 있는 선수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많이 배우고 좋은 결과를 냈으면 좋겠다"면서 "내부적인 문제가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은 결국 우리한테도 누워서 침 뱉기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여전히 야구를 하는 게 행복하고 함께 야구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여자야구 선수들과 좋은 사람들이 개미처럼 일궈온 연맹을 망가뜨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결국은 소통의 문제다. 윤은주 여자야구연맹 이사(위너스 감독)는 "연맹이 문제의 핵심을 잘 받아드렸으면 좋겠다. 우리는 소프트볼 선수를 데려다 쓴 것보다 그런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데 회원단체의 동의나 공감대 없이 처리했다는 것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기금 사용건도 마찬가지다. 충분한 소통과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하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