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현 레인보우 희망재단 이사장)는 여전했다. ‘롯데’라는 두 글자에 자긍심을 느꼈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불러주던 팬들의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는 “현역 때도 은퇴 후에도 롯데가 아닌 다른 팀 유니폼을 입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롯데가 있었기에 박정태라는 사람이 존재했고, 팬들이 있었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야구를 했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박정태의 어린 시절은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가난 때문에 울어야 했고, 불평등이라는 벽 앞에서 좌절해야했다. 방황도 했고, 원망도 많이 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붙잡았던 것은 어려운 살림에도 아들의 꿈을 지켜주고자 노력했던 홀어머니였다. 박정태는 “야구를 하는 내내 어머니를 호강시켜드리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그래서 더 절박하게 야구를 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어려서부터 키워온 근성은 프로에 와서 그의 생존전략이 됐다. 1991년 1차 지명으로 롯데에 입단한 박정태는 현역 시절 가망 없는 타구를 날리고도 1루까지 전력 질주해 ‘탱크', '악바리'라 불리며 투혼의 상징이자 부산 야구의 자존심으로 여겨졌다.
1993년에는 불의의 사고로 발목 복합 골절이라는 부상을 당해 2년 동안 무려 5번의 수술과 재활을 거치고도 성공적으로 복귀해 ‘인간승리의 아이콘’으로 불리기도 했다.
173cm, 75kg의 왜소한 체격을 극복하기 위해 밤늦도록 방망이를 돌리며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갔던 박정태. 그가 구사했던 일명 ‘흔들타법’은 프로에서 살아남고자 했던 노력의 산물이자 몸부림이었다.
반가운 봄비가 내렸던 지난 7일 부산 해운대에서 박정태를 만났다. 야구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천상 ‘야구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그는 레인보우 희망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아이들과 야구로 소통하고 있다.
‘달인을 만나다-박정태 편’은 ‘1부-홀어머니를 위해 악바리가 됐던 아들’과 ‘2부-박정태, 야구쟁이로서의 삶’으로 나눠 연재된다.
- 아마추어 시절 스타급 선수는 아니었지만, 1차 지명으로 롯데에 입단했다.
박정태 “1차 지명이 되려면 야구도 잘해야 하지만, 기회가 좋아야 한다. 구단에서 1차 지명으로 뽑는 선수는 그해 즉시 전력감으로 기대를 걸게 된다. 내가 입단할 무렵에 2루를 보던 박영태 선배님이 은퇴를 앞두고 있었다. 뒤를 이을 선수가 필요했고, 그 자리에 내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롯데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1차 지명을 받은 것보다 기분이 좋았다. 요즘은 1차 지명으로 프로에 들어와서도 2군에서 시간을 보내는 선수들이 많다. 그만큼 프로의 문턱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기술이나 힘에서 신인들이 프로의 기존 선수들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국내 프로 야구의 질이 더욱 높아지기 위해서는 아마야구의 발전이 필요하다. 지도자들이 당장의 성적보다 야구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환경도 만들어져야 한다.”
- 프로에 입단해 꾸준히 주가를 올리던 중 1993년 예기치 못한 부상을 당했다. 이후 2년간 무려 5번의 수술과 재활을 거쳤는데.
박정태 “당시 태평양과의 홈경기였는데 후속타자의 병살타성 땅볼 때 1루에 있다가 2루에서 살아보려고 슬라이딩을 했다. 그때 2루수였던 염경엽(현 넥센 감독)과 충돌해 발목 복합 골절을 당했다. 그해 스프링캠프 때 워낙 준비도 열심히 했고, 시즌 초반에 성적도 좋아서 기대를 많이 했던 해였다. 다치는 순간 준비했던 과정들이 억울했다. 그나마 위안이 됐던 것은 부상 이후 재기를 바라는 팬들의 응원이었다. 그때 내가 사랑받고 있는 선수라는 게 느껴져서 행복했다. 물론 당시 5번에 걸친 수술과 재활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그때는 빨리 재기를 해야겠다는 욕심 때문에 병실에 방망이랑 도구들을 숨겨놓고 의사와 간호사 몰래 웨이트를 하고 연습도 했다. 결국, 그것 때문에 결과적으로 더 안 좋아졌다. 내 욕심만 아니었다면 더 쉽게 갈 수 있었던 길을 어렵게 돌아간 셈이다.”
- 부상 후 돌아와서 화려한 재기를 이뤄냈다. 당시 선보였던 ‘흔들타법(오른 손만으로 배트를 들고 몸을 좌우로 흐느적거리며 타이밍을 잡는 독특한 타격 폼)’이 굉장한 이슈가 되기도 했다.
박정태 “3년을 거쳐 만들어진 타법이다. 그 폼에 장점은 체중이동이 많아 큰 힘을 실을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움직임이 많기 때문에 타이밍 잡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 폼으로 타격을 했던 것은 아니다. 체구가 작은 나로서는 방망이에 최대한 많은 힘을 실어내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해야 했고, 조금씩 단점을 보완해가면서 흔들타법을 완성했다. 폼이 워낙 독특해서 당시에 어린 선수들이 많이 따라 했는데 때문에 레슨 개념으로 초등학교를 돌아다니면서 ‘따라 하지 마세요’라고 당부를 하기도 했다.(웃음) 약점이 많기 때문에 야구를 막 시작한 어린 선수들이 따라 하기는 무리가 있는 폼이었다. 타격에 정답은 없다. 타격폼을 자주 바꾸는 선수들이 있는데, 그것은 지금의 자신에 만족을 못 한다는 것이다. 계속 발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와중에 자신의 것을 놓치지는 말아야 한다. 폼을 자주 바꾸는 일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상한 폼을 갖고도 연구하지 않는 선수가 잘 못된 것 아니겠나.”
- 박정태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경기가 1999년 대구에서 열린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7차전이 아닌가 싶다. 펠릭스 호세와 삼성 팬들의 충돌로 문제가 됐던 상황에서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말로 선수들을 다잡았는데.
박정태 “현역 시절을 돌이켜 봤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이기도 하다. 어려서 집안 사정이 워낙 어려워 하루 벌어서 한 끼씩 먹고 살았다. 그때는 스스로 강해지는 것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이 강했다. 그날 경기에서는 화도 났고, 분위기도 안 좋았지만 함께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선수들 모두 하나로 뭉쳤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 지금까지도 최고의 2루수로 손꼽히고 있다. 박정태의 대를 잇는 2루수가 있다면 누구를 뽑겠는가.
박정태 “(조)성환(은퇴)이가 현역 시절 열심히 잘했다. 머리도 좋아서 영리한 플레이를 잘했다. 성환이가 은퇴했으니 현역 후배들 중에 꼽자면, (정)근우(한화)다. 나하고 등치도 비슷하고 경기하는 스타일도 닮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근우가 나보다 발이 빠르다는 것이다. 근우는 참 야무지게 야구한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박정태를 이기고 싶다는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다. 인터뷰를 보면 박정태를 넘어서겠다는 말을 많이 하더라.(웃음) 농담이고, 선배로서 언제든 내 기록을 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게 프로야구가 발전하는 길 아니겠나.”
- 현역 시절 그라운드 위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덕분에 ‘악바리’ ‘탱크’ ‘인간승리’ 등의 별명으로도 불렸는데.
박정태 “야구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기에 순전히 노력을 통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는 야구로 성공해서 어머님을 호강시켜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연습을 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 어머님 혼자서 자식들을 키웠기 때문에 정말 눈물 날 만큼 고생을 많이 하셨다. 가진 것이 없었기에 내게 성공하는 길은 오직 야구밖에 없었다. 어머님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렇게 열심히 야구를 하지도 않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