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던 선수가 있었습니다. 큰 체구에 타격이 일품이었던 그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할 정도로 전도유망한 선수였습니다. 승부욕도 남달라 연습경기에서 아웃이 돼도 2~3번이고 더 치겠다며 타석에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그와 함께 야구를 했던 또래 친구들은 ‘야구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그런 그가 2006년 프로 신인 드래프트에서 8개 구단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됩니다. 프로 무대에 대한 꿈이 컸던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그 당시 청소년 국가대표팀 멤버 중 유일하게 프로의 지명을 바지 못했다는 것이 그를 더욱 작아지게 했습니다. 그는 “자존심도 상하고,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라는 생각에 힘들었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그날 아버지께서 속상한 마음에 술을 드시면서 ‘내 능력이 부족해서 우리 아들이 프로에 못 가나’라는 말을 하셨는데 죄송하기만 했다”고 회상했습니다.
당시 한 야구 관계자는 그의 프로 지명 실패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타격 재능은 좋았지만, 수비나 주루가 많이 부족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가 고교시절 본래 1루수로 활동했기 때문에 외야 수비 능력에 대한 검증이 필요했다. 아마추어 시절 몇몇 대회를 통해 수비쪽에서 부족한 부분이 드러났고, 기동력까지 부족해 발전 가능성이 적다고 봤다. 한 마디로 프로에서 성공하기 힘들다고 본 것이다.”
결국 그는 두산에 신고 선수(육성선수)로 입단하게 됩니다. 그는 “두산의 연락을 받고 기회를 얻었다는 생각에 기뻤다. 그러면서도 지명 받지 못했던 설움을 날리고 싶었다. 다른 팀들이 나를 데려가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두산의 사령탑이었던 김경문 감독의 눈에 들었던 그는 이듬해 개막엔트리에 합류하며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이후 국가대표 외야수로 등극하며 ‘타격기계’라는 별명까지 얻었죠. 눈치 채셨나요. 그는 바로 신고 선수로 입단해 메이저리그 진출까지 이뤄낸 김현수(볼티모어)입니다.
김현수의 프로 실패를 추측했던 야구 관계자는 “김현수의 프로 지명 실패는 편견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인정합니다. “프로 행을 앞둔 선수들의 경우 전국 대회가 쇼케이스인 셈이다. 그 쇼케이스를 망칠 수는 있지만, 선수의 발전 가능성은 제대로 봤어야했다. 나중에 프로에 와서 잘 되는 것을 보고 거칠고 아주 매력 있는 원석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김현수는 신인 드래프트에서 외면 받고 신고 선수로 프로에 들어와 한 팀의 주전이 되기까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시련을 극복했던 힘이 결국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김현수는 “밑바닥을 경험했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시련 속에서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이겨내고자 하는 오기와 ‘나는 할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는 또 한 번의 외면을 당하고 있습니다. 꿈의 무대인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평가 되고 열외 되고 있습니다. 11년 전에 국내 야구관계자들이 고교생 김현수에게 들이댔던 섣부른 잣대를 지금 볼티모어에서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그것을 감당하는 것은 온전히 김현수의 몫입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가 ‘이겨내고자 하는 오기와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지금의 시련을 잘 이겨내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김현수의 모바일 메신저의 문구를 인용할까 합니다. ‘Never give up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