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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보다 강렬한 조연] '공작'의 김정일을 연기한 기주봉

18.08.16 13:59


<공작>의 흥행과 함께 극 중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짧게나마 출연해 압도적인 존재감을 남긴 출연자에 대한 반응도 뜨겁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실존 캐릭터인 만큼 대체적으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지만, 제작진은 김정일과 가장 비슷한 체형을 지닌 배우를 물색한 후 할리우드의 특수 분장팀을 통해 외형적으로 완벽한 김정일 재연에 성공했다. 하지만 난관 같은 이같은 재연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120여 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하며 연극, 브라운관, 스크린을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활동하는 베테랑 연기자의 존재감 덕분이었다. 주연급 배우인 황정민, 이성민, 주지훈 모두 그의 김정일 연기에 긴장했을 정도로 출중한 연기를 자랑하며 한국 영화계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활약 중인 그의 이름은 기주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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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기주봉
생년월일:1955년 9월 3일
학교: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
신장:172cm

기주봉은 집안 내력부터 남달랐다. 호남 유학의 거두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5대손으로, 그의 종증조부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은 을미의병 당시 호남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그의 아버지는 연극인이었지만, 군사독재 시절 사상범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게 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일찍 돌아가셨다. 친형인 기국서는 한국 연극계의 대부로 불리는 연출자로 기주봉은 형과 함께 76극단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이렇듯 남다른 배경을 지닌 그가 배우가 되기로 한 계기는 아버지의 영향도 컸지만, 중학생 이던 1960년대 중반에 우연히 친구들과 남산에 놀러 가다가 영화배우 남궁원을 보게되면서부터였다. 남궁원의 우아한 모습에 반한 기주봉은 막연하게나마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고,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되었다. 그렇게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후 1976년 신촌을 거점으로 창단한 76 극단을 통해 연극계에 들어서게 된다. 극단에 합류한 뒤 단역과 조연 역할을 맡았던 그는 1978년 사무엘 베케트의 [마지막 테잎]을 통해 처음으로 주연을 맡게 되었다. 모노드라마 형식의 설정이 익숙지 않은 터라 첫 주연 데뷔는 쉽지 않았고, 그로 인해 무수한 비판과 욕을 받게되면서 연기를 통한 장래에 대해 고민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이 연기자 기주봉을 성숙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고, 감정이 기조를 이루는 연기 방식을 통해 자신만의 연기 방식을 완성한다.

이후 1979년 한국 연극의 지형도를 뒤흔든 연극 [관객모독]의 주연으로 출연해 최고의 열연을 선보이며 '신촌의 앙팡테리블'로 불리며 연극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관객모독]의 특징이 객석을 향해 거친 언변과 욕설을 쏟아내는 파격을 선보이는 동시에 마지막에 물을 끼얹는 기행으로 마무리 되는 형식이었기에 이때 당시 초연을 맡은 기주봉과 연출진을 향한 관심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가 속한 76 극단이 국립극장에서 [햄릿][미친 리어]를 나란히 선보이며 승승장구하게 되었고, 그 선두에는 기주봉과 그의 형 기국서가 있었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그에게 새로운 별명이 생기니, 특유의 작은 체구에 재기발랄한 연기를 펼치는 그의 모습에 빗대어 '동숭동 마라도나'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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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용한 가족>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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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친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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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클레멘타인> (2004)

대학로의 스타였던 그가 영화에 출연한 것은 1980년 평소 친분이 있었던 이장호 감독의 영화 <어둠의 자식들>을 통해서였다. 나영희, 안성기, 김희라와 같은 쟁쟁한 배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조연으로 출연한 그는 이때의 경험으로 연극과 영화를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연극계의 스타와 조연 배우도 현실에서는 가난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시 문화계의 현실. 20대 내내 연기에 주력했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인 된 그는 청춘을 바친 연기를 포기하고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간 정수기 회사의 판매원으로 나서게 된다. 하지만 한 때 무대 위에서 관객을 압도했던 그가 판매원으로 활동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도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판매원 생활마저 일찍 접으며 몇 달을 방황하던 그는 다시금 연기를 하기로 결심하고, 레스토랑에서 셰익스피어 극의 독백을 손님들에게 소개하는 생활연극을 통해 다시금 연기의 감을 잡아나가기 시작한다. 

조금씩 연극 무대에 서며 존재감을 보이던 그는 1997년 장선우 감독의 문제작 <나쁜 영화>를 통해 본격적인 영화 출연을 재개하게 된다. 어느덧 40대 중반에 들어선 뒤늦은 활동이었지만, 오랫동안 연극계를 지배했던 그를 동경하고 유심하게 봐왔던 김지운, 박찬욱 같은 젊은 연출자들은 그의 가능성을 보고 자신의 작품에 출연시키려 했다. 기주봉의 행운 같은 '출연 행진'은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그는 매번 짧지만 강렬한 역할로 관객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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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경축! 우리사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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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리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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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인의뢰> (2015)

1998년 출연한 김지운 감독의 블랙코미디 <조용한 가족>에서 송강호에게 "학생은 고독이 뭔 지 알아?"라고 말한 고독남,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깡패보다 더한 강력반을 운영하는 강력반장, "군인이 전쟁을 무서워하면 쓰나"라고 말하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강경파 군 간부, <친구>에서 미소 한 번으로 극의 분위기를 장악한 조직 보스, <소름>에서 창작욕으로 인해 스스로 미쳐가는 이 작가, <와일드 카드>에서 국경일 때만 하는(?) 형사 반장을 연기하며 90년대 후반, 2000년 초반 유행한 한국 영화 르네상스를 주도한 작품들의 성공에 일조했다. 

▲<조용한 가족>의 출연 장면, 송강호와 함께한 이 대목은 이 영화의 큰 웃음 포인트가 되었다

이후에도 기주봉의 출연은 지속되었고, 장르와 작품, 출연 비중의 구분을 두지 않고 다양한 역할을 선보이며 어떤 장르에도 적응하는 유연성을 보여줬다. 네티즌들로부터 '전설적인 망작'으로 불리고 있는 <클레멘타인>에서도 비중 있는 역할로 등장했으며, 저예산으로 제작되는 단편, 독립 영화에도 모습을 드러내며 후배 영화인들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4년 김명민의 열연으로 화제가 된 <불멸의 이순신>에서 윤환시로 출연하며 브라운관 진출도 꾀하게 되었다. <부활><연애시대> 같은 당대 인기 드라마에도 그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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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유의 언덕>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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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차이나타운>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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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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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강변호텔> (2018)

2007년 <밤과 낮>을 통해 홍상수 감독과 인연을 맺은 이후 그의 작품에 고정적으로 출연하게 되었고, 이번에 개봉을 앞둔 <강변 호텔>의 주연을 맡아 제71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해 데뷔 이래 최고의 영예를 않게 되었다. 이번 <공작>을 비롯해 1년 전 개봉한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와 같은 주연작이 등장할 정도로 근래들어 기주봉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만큼 이제는 조연이 아닌 매력적인 주연이자 비중 있는 연기자로 자주 등장했으면 한다. 

자료참조
대학로에서 충무로까지 ㅣ 배우 기주봉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년 1월 16일
[기주봉] "이제 되새김질을 할 때 같아요." - 씨네 21 2008년 4월 16일
[단독인터뷰] 기주봉 "배우 하고 싶어 연극반 있는 중학교 진학했다" - OBS 2013년 6월 19일


최재필 기자 (보도자료/제휴 문의/오타 신고) movierising@hrising.com

(사진=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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