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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다옹] 두산 성영훈의 '재활 그리고 희망'

16.04.27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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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프로 입단 당시 ‘서울이 배출한 최고의 오른손 투수’라는 평가를 받으며 메이저리그 진출까지 거론됐던 성영훈(두산). 그의 꿈의 크기는 시간의 흐름과 역행했다. 잦은 수술과 재활로 미래를 기약할 수 없었던 불안함이 성영훈의 꿈의 크기를 작고, 소박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성영훈은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질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 그의 말에서 진한 절실함과 절박함이 묻어났다.

시련의 시작은 2010년이었다. 당시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4차전에 등판한 그는 마운드에서 ‘퍽’ 소리와 함께 팔꿈치 인대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이전부터 팔꿈치 통증을 안고 살아왔던 터라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곧바로 수술대에 올랐고, 공익근무와 재활을 병행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성영훈은 ‘아프지만 않는다면 제대해서 야구를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대 후 팀에 합류했지만, 어깨 통증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공을 던질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또 다시 그는 재활의 긴 늪에 빠졌다. 결국 성영훈은 지난해 6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어깨 관절경 수술을 받았다. 

20대 꽃다운 나이의 절반을 수술과 재활로 보내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고독함에 몇 번이고 좌절했지만, 성영훈은 웃는다. ‘아프지만 않는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에게는 긍정의 힘이 되고 있다. 

성영훈의 ‘재활 그리고 희망’은 2편에 걸쳐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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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 입단 당시 큰 화제를 모았다. 당시 계약금 5억5000만 원이 기대치를 말해주는데.  

성영훈  “물론 기쁘긴 기뻤지만, 들뜨지는 않았다. 고3이 되고 10월에 전국체전을 나갔는데, 그때부터 팔꿈치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는 팔꿈치가 안 좋아도 며칠 쉬고 나면 나았는데, 그때는 통증이 심상치 않았다. 프로에 가는 사실이 기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계속했던 것 같다. 그래서 마냥 들뜰 수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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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였을까. 2009년 4월8일 한화전에서 데뷔한 후 팔꿈치 통증으로 이렇다 할 활약이 없었다. 

성영훈  “아파도 참고 던지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하지만 잘 되진 않더라. 데뷔전 이후에 2군에서 계속해서 재활만 했다. 재활을 하면서도 아프지만 않는다면 야구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2010년에 재활을 끝내고 공을 던지는데 내가 평소에 갖고 있는 밸런스가 아니더라. 첫 재활 후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때는 1군에서 불러줘도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납득이 안 되고 창피했다. 야구를 시작한 후에 단 한 번도 그만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그때 처음으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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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2010년 시즌 종료 후 팔꿈치 인대 접합수술을 받았다.

성영훈  “당시 플레이오프 엔트리에 들어갔다. 4차전 때 불펜에서 몸을 푸는데 팔꿈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 싶더라. 결국 그날 경기에 등판해 공을 던지다가 팔꿈치 인대가 끊어졌다. 정말 ‘퍽’소리가 나더라. 그 전부터 팔꿈치 때문에 고생을 했기 때문에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술을 하고 공익근무를 하면서 재활을 했는데, 아프지만 않는다면 복귀해서 공을 잘 던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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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군 제대 후 이번에는 어깨가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상실감과 실망감이 상당했을 것 같은데. 

성영훈  “욕심이 앞섰던 내 탓이었다. 이제까지 야구를 하면서 팔꿈치 이외에 다른 곳이 아팠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하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야구 잘할 일만 남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나 프로에 들어와서 기대만큼 잘 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감도 있었다. 그래서 옛날 몸 상태만 생각하고 무리를 해서 몸을 끌어올리려고 하다 결국 어깨가 탈이 난 것이다. 어깨까지 다치고 나서는 ‘왜 세상이 이토록 나에게만 가혹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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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 입단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고교 시절 혹사 논란’을 피해갈 수 없었다. 

성영훈  “나는 고등학교 때 선발로 경기에 나간 적은 많지 않았다. 거의 불펜에서 공을 던졌는데, 문제는 이닝 수가 많지 않았지만, 1회부터 계속 대기를 하고 몸을 풀어야 했기 때문에 투구 수가 많긴 했다. 팔꿈치의 경우 쌓였던 것들이 결국 터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혹사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상당히 조심스럽다. 만약 내가 고등학교 때 그렇게 기회를 받지 못했더라면 프로 지명도 안됐을 것이다. 그 시기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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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여전히 고등학교 졸업 후 프로에 들어와 재활을 하거나 수술대에 오르는 선수들이 많다. 경험자로서 한마디 한다면.    

성영훈  “팔꿈치나 어깨에 약간의 통증이라도 느껴진다면 쉬어주는 것이 좋다. 결국 내가 건강하고 안 파야 시합에 나갈 수도 있고, 팀이 이길 수도 있다. 건강을 잃고 나니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더라. ‘참을 수 있는 고통이다, 아니다’를 본인이 섣불리 판단하거나 무심코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국 그런 것이 쌓이다 보면 문제가 일어난다. 자기 몸을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다.”



내일 (4/27 목요일) 성영훈의 ‘재활 그리고 희망’ 2편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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